건반 위의 철학자

힐링하기 좋은 책이다. 힐링하기 좋은 책이다. 이 곳에 나오는 음악들을 정리하여 들으면서 읽기로 결정하였다. 읽는 내내 감동한다. 음악을 찬양하는 느낌이 물씬 든다.

  1. 사르트르

p.12 철학과 음악은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사르르트는 감미로운 멜로디를 연주하는 순간을 지적 담론과 철저히 분리시켰다. 바그너 음악의 현대성에 관해 썼던 니체는 쇼팽의 마주르카를 들으며 울먹였고

  사르르트는 크세나키스와 슈톡하우젠에 관한 글을 썼지만 쇼팽을 열렬히 사랑했다. 그리고 바르트가 가장 아꼈던 작곡가는 다름 아닌 슈만이었다.

p.13 자아는 내면의 불협화음과 리듬을 감추는 하나의 구조물이고 우리는 우리 자신과 끊임없이 타협하며 산다. 악기를 연주하는 것은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를 자발적인 수동성과 색다른 시간의 경험으로 이끈다.

p.13 개인을 사회을 집단적인 리듬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길이 피아노에만 있지 않을것이다.

장 폴 사르트르 / 오프비트 피아

p. 17 무릇 지식인이란 자신과 관련 없는 분야에 몰두하는 족속들이기 때문이다.

역 #슈톡하우젠 #메시앙

p. 20 희가극을 즐겼던 사르트르의 경우,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그가 청중을 놀래키고 싶을 때 즐겨 연주하던 곡은 <툴레의 왕>(Roi de Thule’)이었다.

p. 21 바그너를 찬양해 마지 않던 니체가 <카르멘>을 좋아한 것이 단지 바그너를 도발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p. 29

p. 28. 쇼팽의 녹턴은 나른하게 비탄에 잠긴 채 서정적인 멜로디를 들려준다. 사르트르는 타인에게 강요된 시간성에 쫓기지 않고 자기 기분이 내키는 대로 마음껏 연주하며 유희한다.

p. 31 연기에 몰입한 배우가 극중 인물과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처럼 그는 상상의 소리로 가득한 세계에 들어가 역할극을 즐겼다.

p. 32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손은 자주 철학적 담론의 대상이 되어왔다. 사르트르 역시 [존재와 무]에서 움켜잡고 잡히는 손에 대해 썼다. 그는 묻는다. 몸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가 내 몸 안에 있는 것은 조종사가 배 안에 있는 것과 같은가? 사라타라는 자신의 손으로 데카르트에 답한다.

나는 몸으로 ‘존재’한다. 나는 펜으로 글을 쓸 때처럼 내 손을 사용해 쓸 수 있지만, 펜을 내 몸에서 떼어낼 수 있는 것과 달리 손은 떼어낼 수 있다.

p. 36 장 폴과 그의 뒤에 서 있는 아를레트는 자신들을 침범한 카메라의 시선을 받아드링면서도 외면하려는 듯 악보에서 눈을떼지 않는다.

p. 39 음악은 공동 모색하는 사람들의 영역이다. 굳이 엘리트주의를 들먹이지 않고도 우리는 음악이 아무나 공유할 수 있는 예술이 아니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선율과 화음에 감응 할 수 줄 아는 감각 있는 ‘운 좋은 소수’만 음악을 향유할 수 있다.

운 좋은 소수에 들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p. 41

p. 52어린 사르트르는 보호자들에게 저항하면서 음악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 시간이 사르트르에게 트라우마로 남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르트르는 저항을 통해 주체로서의 자아와 실재하는 세계 사이, 자아와 시간성 사이의 독특한 연결을 경험했다.

p. 52 우리는 하나의 주체로서 내면을 흐르는 복수의 리듬에 따라 사랑하고 인식하고 사유하며 자아를 구성한다. 그 리듬들은 한꺼번에 뒤따르고 결정되고 합쳐진다. 내가 이 책에 내놓은 가설은 음악 연주가 개인에게 독특한 시간성을 경험토록 한다는 것이다. 독특한 시간성이란 우리 자신이 구성해낸 세계에서 스스로를 주체로 만드는 시간을 뜻하는데 이 시간 속에서 우리는 실재 세계와 질서 있게, 때로는 무질서하게 관계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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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55 [변증법적 이성비판]은 사르트르 사후에 다시 정리될 필요가 있었다. 다수의 이야기에 이리저리 연결되고 삽입되며 한없이 늘어지는 문장들. 기묘함은 여기서 기인한다. 사르트르는 프루스트식의 삽입 종속절을 쓰지도 않았는데 종종 주어를 찾기 힘든 데다, 보어절과 종속절은 지나치게 많이쓰여 독자로 하여금 갖은 추론을 쏟아내게 만든다.

사르트르의 논리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모든 수사적 질서를 무시하고 펼쳐지는 흐름에 동화되야 한다. 마침내 글쓰기는 생각과 한 몸을 이룬다. 글쓰기가 생각과 함께 달린다. 책을 속히 완성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힌 철학자의 조바심이 글에 묻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 책은 질주하는 생각의 속도에 글 쓰는 속도를 최대한 맞추려는 초인적인 노력으로 써진 것이다.

p. 56 그는 [말]에서 프랑스 고전 산문의 아름다운 수사법을 사용한다. 사르트르의 이러한 면모는 바흐와 모차르트를 계승하면서도 낭만주의 시대를 열었던 멘델스존을 떠올리게 한다. 문학에는 이별을 고하고 언어에는 사랑을 고백하는 것. 패러디는 사르트르가 잘 쓰는 작법이었다.

p. 56 반면 [변증법적 이성비판]의 철학적 글쓰기에서 사르트르는 흐름의 중심에 있었고 결코 멈출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끊이지 않는 생각이 그를 지배했던 것이다.

생각과 그것을 종이에 옮겨적는 행위 사이에 발생하는 시간차에 관한 담론은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래됐다. 사르트르는 이 시간차를 발작적으로 표현했다.

사유와 글쓰기의 동시성은 글쓰기의 정치학을 내포하며, 직접 민주주의를 향한 사르트르의 정치적 이상과도 맥을 같이한다.

변화의 흐름에 참여하는 쪽이 가만히 앉아서 구경하는 쪽보다 낫다. 멈추지 말고 표출할 것. 역사의 시간이 나 자신을 관통해서 흐르도록 할 것. 그리고 시대 흐름과 하나 될 것.

p. 62

인간의 시간은 ‘시간화된 단면들’로 구성된다. 시간화된 단면들은 각각의 존재가 세운 계획에서 일탈하고 팽창함으로써 직선이 아닌 소용돌이 형태를 만들어낸다. 사르트르는 평생 많은 사람과 장소, 감정과 특별한 만남을 지속해왔고 이러한 만남이 나선형을 이루며 ‘연속성의 해법’을 창조해낸 것이다.

사르트르는 주기적으로 자신의 내적 혁명을 검토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스스로의 탄생과 재탄생을 지휘하고 있는 시대의 작가라는 환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동일한 현재를 산다고 여기지만 우리 각자는 굉장히 다른 시간과 리듬 속에 살고 있다. 피아노 연주는 이 비밀스러운 시간성에 동참한다.

음악은 자기 완결성을 갖는다. 다른 외적인 이유를 필요로 하지 않고 그 자체로 충족된다. 음악은 순수 그자체이기 떄문이다.

이 책의 작가분과 번역자분께 감사를 표현합니다. 덕분에 엄청난 책을 읽었습니다.

2. 니체

” 음악 없는 삶은 오류다.”

P. 87 피아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노래가 노래하게 하고 반주가 반주하게 하는 것이다.

당시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던 음악적 담론과 거리가 멀었고, 니체가 드라마틱하게 풀어낸 예술적 전투장면에서도 빠져 있다.

P. 92 쇼팽이 지닌 이탈리아적 특색은 니체가 각별히 좋아했던 <뱃노래 F#장조 Op.60>에서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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